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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성균관

운영
성균관 재정 기반인 토지 100결 지급 기록

성균관 재정 기반인 토지 100결 지급 기록

  • 성균관 재정 기반인 토지 100결 지급 기록
  • 성균관 재정 기반인 노비 100구 지급 기록
  • 증보문헌비고의 성균관 규정 학령
  • 세종실록에 언급된 원점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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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변경된 성균관의 직제 성균관의 직제는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경국대전』의 규정을 보면 겸관으로 지사와 동지사 각 1명, 총장격인 대사성 1명, 사성 2명, 사예 3명, 직강 4명, 전적 13명, 박사 3명, 학정 3명, 학록 3명, 학유 3명과 서리 10명을 배속시켰다. 성균관원은 타 교육기관의 교관을 겸하기도 하였는데, 사성 이하 전적 이상의 관원 중 일부는 왕실 교육기관인 종학의 교관을, 전적 이하의 관원 중 일부는 성균관의 부속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학당의 교관을 겸하였다. 교관 겸직 이외에도 양현고나 봉상시와 같은 일반 행정직의 업무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외부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관리들에게 성균관직을 겸하게 하고 성균관의 교육을 부분적으로 담당하게 하기도 하였다. 성균관이 타 기관의 교관을 겸하였기 때문에 정작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데에는 소홀함도 있었고, 또 교관직을 기피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학식과 품격을 갖춘 외부 기관의 관리를 겸직시킴으로써 성균관의 교육의 내실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은 과거시험의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원칙으로 하여 200명(세종대에 증원)을 정원으로 하였다. 정원이 부족한 경우 학당 학생 중 15세 이상이면서 학업이 뛰어난 자와 문음 자제들 일부를 선발하여 보충하였고, 이들을 정식 입학생과 구분하여 기재생(寄齋生)이라고 하였다. 유생들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 머물면서 공부하도록 되어 있는데, 동재와 서재를 각각 상하로 나누어 상재(上齋)에는 생원과 진사가, 하재(下齋)에는 기재생이 거처하도록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활동 성균관은 국가의 관리를 받아 엄격하게 통제를 받으며 운영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생들의 자치활동을 보장하고 장려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장차 국가의 관리로 활동할 예비 자원이었기 때문에 관리로서의 적극성과 책임감을 키우기 위한 배려이자 정책이었다. 자치활동은 현대 대학의 학생회와 유사한 재회(齋會)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임원을 선출하여 성균관에서의 학업과 생활을 스스로 관리하였다.

재회는 대표격인 장의(掌議)를 동서재에 1명씩 두었고, 각 재에는 상하재 별로 대표인 색장(色掌) 1명씩, 총 4명을 두었다. 이들은 봄과 가을로 교체하도록 하였지만, 횟수에 관계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재회에서는 자체 규약인 재규(齋規)를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 및 생활태도에 대해 상벌을 가할 수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출관(出館, 퇴학)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성균관은 관학이었기 때문에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 및 학생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나 학용품까지도 모두 국가에서 지급하였다. 재정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학전(學田)이었다. 성균관 혹은 양현고 소유로 땅을 지급하고 그 땅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성균관을 운영하였고, 노비도 지급하여 운영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약 2,000결(結)의 토지와 300여 명의 노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가의 철저한 관리와 감독을 받은 성균관 조선시대에 학교는 ‘풍화의 근본’이었다. 성균관은 그 중 으뜸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이러한 관심과 지원만큼 철저하게 국가의 관리와 감독을 받기도 하였다. 규정의 기본은 『경국대전』이었고, 기타 각종 절목, 사목, 모범 등의 보충 규제에 의해 관리되었다. ‘학령’은 성균관과 관련된 규정이었고, 주로 유생들의 성균관 내에서의 행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균관 유생은 반드시 재에 기숙해야 했고, 기숙 여부를 식당에 비치된 도기(到記, 출석부에 해당함)를 통해 점검하였다. 단순히 출석을 점검하는 것을 넘어 각종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자격 요건으로 활용하였다. 이렇게 출석을 점검하고 운영 방법을 명시한 규정을 ‘원점절목’이라고 하였다. 유생이 획득한 원점을 과거시험 응시와 연계한 것은 기대한 만큼 성균관 운영이 내실을 기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국가적 중요성에 비해 교관이나 시설, 대우 등의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을 기피하여, 정원 200명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원점을 과거시험과 연계하여 유생들이 성균관에 기숙하면서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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