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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학규의 모범을 제시한 이황의 이산서원규 정면

서당 학규의 모범을 제시한 이황의 이산서원규 정면

  • 서당 학규의 모범을 제시한 이황의 이산서원규 정면
  • 서당 학규의 모범을 제시한 이황의 이산서원규 측면
  • 옛그림 속 서당 훈장
  • 옛그림 속 서당 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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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연령이 자유로운 서당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아동들이었기 때문에 연령상으로는 7, 8세부터 15,6세의 아동들이 중심이었다. 그렇지만 입학 연령에 대한 별도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가 든 남자들도 입학할 수 있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20세가 넘는 사람도 입학해서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서당에 입학하는 날은 대개 동짓날을 택했다. 그것은 동지 이후에 음의 기운이 점차 쇠하고 양의 기운이 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치는 시기 역시 제한이 없어서, 서당에서의 학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향교나 서원과 같은 상급 교육기관으로 옮겨야 할 때가 되면 그것이 곧 졸업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입학할 수 없었다. 남녀의 구별이 강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공동의 공간에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학과 공부보다는 가정에서 가사를 배워야 했고, 가정에서 한글이나 한자를 통해 배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상류층으로 제한되는 서당의 학생들 서당 공부는 형식적으로 노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아동에게 열려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모든 아동이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와 신분에 따른 차별이었다.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는 시간만큼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고, 아이들도 생산에 한 몫을 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기본적인 재산이 있지 않다면 생산 활동에서 벗어나 교육에 전념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조선 사회에서 서당이 교육 기능 외에 향촌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향촌질서를 확립하고,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당의 학생들은 신분적으로도 상류층으로 제한되었다.

서당의 경비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서당에 대해 국가가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유도했던 이유도 경제적인 여력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당을 운영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의 대부분은 인건비였다. 즉,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을의 공동 건물이나 개인 집의 빈 공간을 활용해서 교육을 했기 때문에 주된 교육 경비는 훈장의 급여였고, 이것은 국가가 아닌 배우는 학생들이 부담해야 했다.

훈장이 받는 수고비, 곧 서당의 학비는 대개 훈장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현물로 지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처음 입학할 때는 술, 닭, 옷감 등의 예물을 갖추어 훈장을 찾아뵙는 것이 상례였고, 평상시에도 쌀이나 땔나무, 의복 등을 수업료로 지급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월사금 명목으로 한 냥씩 거두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이처럼 서당의 학비는 가정형편이나 지역 사정에 따라 각각 달랐다.

교육의 책임자 훈장과 보조자 접장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서당에서도 훈장의 자질은 서당 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처음으로 교육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학식의 측면이나 품행의 측면에서 아동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존재였어야 했다. 그러나 서당 자체가 다양했듯이 서당 교육을 책임졌던 훈장도 각양각색이었다. 학생들에게 한자와 아동교육서, 경서를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학식과 품행에 있어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자격자였지만, 많은 경우는 그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관학에서도 마땅한 교관을 갖추지 못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시골의 훈장 모두가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 채우기는 어려웠고, 심지어는 학생들을 지도하기 곤란한 수준의 훈장도 있었다.

서당에는 훈장과 학생 이외에 접장(接長)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접장은 요즘말로 조교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대개 규모가 큰 서당에서 훈장 혼자 학생들을 지도하기 어려운 경우 학생들 중에서 나이가 많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해서 훈장의 역할을 대신하거나 보조하게 했던 존재이다. 접장은 직접 학생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였기 때문에 큰 서당의 경우 훈장보다도 영향력이 큰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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