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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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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지에 실린 성균관 배치도

태학지에 실린 성균관 배치도

  • 태학지에 실린 성균관 배치도
  • 성균관의 제향 공간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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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시대에 인재 양성을 위해 한양에 세운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1887년(고종 24) 경학원(經學院)으로 명칭을 변경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고등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이라는 명칭 이외에 국학(國學), 태학(太學), 국자감(國子監), 반궁(泮宮), 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등 교육의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을 살펴보면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에 학교가 설립되었고, 신라시대에는 672년(문무왕 12) 국학이, 고려시대에는 992년(고려 성종 11) 국자감이 설립되어 운영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등 교육의 흐름은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졌고, 유교적 통치이념에 따른 국가 운영의 필요성 때문에 그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고 구체화되었다.

국가 정책 달성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된 교육기관 우리나라 고등 교육기관의 역사는 서양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설립과정의 의도성 및 설립 주체에 있다. 서양의 경우 도시의 성장과 함께 도시 및 시민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한국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설립되었고 국가에 의해 운영되었다. 조선의 성균관 역시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하여 건국 초부터 국가 정책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조선의 성균관은 명칭이나 기능에 있어서 고려의 국자감(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성균관으로 개칭)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한양 천도에 따라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 터를 정하고, 1395년(태조 4)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후인 1398년(태조 7)에 완성하였다. 문묘 시설인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 강학 시설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西齋)와 같은 주요 시설을 비롯해 각종 부속건물이 설치되어 총 96칸에 이르는 조선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생한 왕자의 난과 화재, 개경 천도 등으로 정상적인 운영은 어려웠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확장 및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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