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사상가
정약용(丁若鏞)
생애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실학을 집대성하고 발전시킨 학자이다. 본관은 압해(押解),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또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정약용은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4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서 7세에는 이미 오언한시를 지을 정도였다. 10세에는 자신의 시문을 모은『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고, 16세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문 28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10여 년 동안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정조 승하 후 발생한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중앙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순조 18)까지 오로지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여 다 방면에 걸쳐 현실 개혁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결실을 맺었다.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혁에 초점을 맞춘 정약용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18세기 후반의 사회적 분위기와 어려서부터 ‘근기학파(近畿學派)’의 사회 개혁 이론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자군의 사회 개혁 논의에 큰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고 결국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교육 정약용은 교육 이념의 핵심을 실학에 두고, 당시의 폐단을 실사구시(實事求是)만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교육 인간상으로 수기위천하인(修己爲天下人)을 보았는데 이는 자기 수양으로 능력을 닦고, 이를 천하와 국가를 위해 실천궁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교육 방법으로 실천성을 강조했고, 그 하나의 결정체가 『아학편』이다. 정약용은 천자문 비판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으로 어린이를 위한 입문서 『아학편』을 저술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아동이 감각기관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글자와 개념을 학습한 이후 추상적이고 무형의 개념을 표현하는 글자를 익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