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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교육 사상가

조식(曺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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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을 배향하는 덕천서원(문화재청)

남명 조식을 배향하는 덕천서원(문화재청) 남명 조식을 배향하는 덕천서원 숭덕사(문화재청)

생애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健中), 호는 남명(南冥)이다. 1501년(연산군 7)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후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으며 20세까지 주로 한양에 거주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천문·지리·의술·궁마·병진에 두루 통하였고 노장학(老莊學)과 고문(古文)에도 능하였다.

학문 조식은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관리가 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묘사화와 무오‧갑자사화의 영향으로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평생에 걸쳐 나라의 부름을 받고서도 끝내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식은 관념철학 위주로 흐르던 당시의 학자들과는 달리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강조하면서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제자들에게도 연결되어 그의 제자들 중에는 곽재우처럼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친 이가 많이 있다. 15세기 영남의 사림파가 이룩한 학문적인 연원을 계승‧발전시켜 남명학파(南冥學派)를 형성하였다. 사후에 대사간에 추증되었고, 1615년(광해군 7)에는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교육 조식은 교육 목적을 윤리 덕목 중에서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았다. 교육 방법으로 첫째는 자해자득(自解自得, 스스로터득) 둘째는 경(敬)과 성(誠), 셋째는 박문약례(博文約禮, 학문을 널리 닦아 몸가짐을 예법에 맞게 함), 넷째는 널리 배우고 깊이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것, 다섯째는 주체적이며 실용적인 학문 태도, 마지막 여섯째는 개성과 자질에 적합한 교육을 강조했으며, 스스로 이를 실천했다.